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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역사유래

충북음성 맹동면 방축골 교우촌

최양업 신부님의 주요 사목지로 6분의 순교자들이 나온 교우촌

진천 배티(梨峙)는 신유박해(1801년)로부터 병인박해(1866년)까지 이어지는 천주교 박해시대 때 천주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들었던 골짜기로, 1830년을 전후로 교우촌이 형성되기 시작하여 1866년 즈음에는 교우촌이 15곳에 이르렀던 곳이다. 기록에 그 이름이 보이는 교우촌만 해도 배티, 삼박골, 은골을 비롯하여 정삼이골, 용진골, 절골, 지구머리, 동골, 지장골, 발래기, 통점, 조금 떨어진 원동, 새울, 굴티, 방축골 등 15곳이나 된다. 이 15개 교우촌 중 ‘방축골’은 음성군 맹동면 봉현리(봉암)이며 ‘하개안 계마대 인근에 있는 방축골’이라는 지명중 계마대의 위치는 봉암저수지와 유가네 농장 사이에 있는 지역으로 확인됐다.

봉암의 ‘방축골’과 ‘계마대’는 1839년의 기해박해 이후 천주교 신자들이 이주해 와서 교우촌을 만들고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했던 마을이다. 당시 이곳에는 김백심(암브로시오. 1794∼1866), 송군명(바오로), 김경장, 이 베드로 가족이 살았다. 또 얼마 뒤에는 충주 광벌(충주시 신니면 광월리)에 살던 민윤명(프란치스코. 1822∼1867) 회장 가족이 계마대로 이주해 왔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사목 순방 도중에 방축골과 계마대에 들러 교우들에게 성사를 주고, 김백심(암브로시오)의 막내아들 사도 요한을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진천 배티에 있는 조선대목구 신학교로 보냈다. 당시 요한의 나이 열여덟 살이었다. 이후 그는 배티 신학교에서 공부하다가 1854년 3월 말레이시아 페낭 신학교로 가서 유학했지만, 1863년에 귀국하자마자 환속함으로써 성소의 결실을 얻지는 못하였다.

방축골과 계마대 공동체가 박해자들에게 발각된 것은 1866년의 병인박해 때였다. 충주 진영에서 파견된 포교와 포졸들이 들이닥쳐 신자들을 체포한 것이다. 그 결과 김 암브로시오는 서울로 압송되어 1866년에 순교하였고, 그의 차남 김성서(파비아노)와 계마대의 민 프란치스코 회장은 충주로 끌려가 1867년 초에 순교했으며, 이 베드로는 1866년 수원에서 순교하였다. 1868년에는 천안 복구정(천안시 북면 연춘리)으로 피신해 살던 김 암브로시오의 장남 김성회(바오로)와 막내 사도 요한(신학생 출신)이 체포되어 서울에서 순교하였다.
한국 천주교회는 방축골ㆍ계마대 출신 순교자 중에서 민윤명(프란치스코) 회장의 시복을 추진하고 있다.

맹동 방축골은 맹동면 서북부에 위치하였으며 마을 앞으로 한천천 지류가 흘러 나가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본래 충주군 맹동면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계리(新溪里), 개현리(介峴里), 봉암리(鳳岩里)의 일부를 병합하고 봉암리와 개현리에서 이름을 따서 봉현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가느실(에딴골,세곡), 개오개(개현), 박촌(개고개,개현), 벌봉암, 봉암, 새터, 향촌 등이 있다. 개오개 앞에는 개오개구레가 있고, 개고개 동남쪽에는 계마대가, 개고개 북쪽에는 국수들이, 봉암 서남쪽에는 빼내들(배자들·배자평)이, 계마대 동쪽에는 새보들이, 향촌 앞에는 향촌들이 있다. 봉암에는 1940년 10월에 준공된 봉암소류지가 있고 동쪽에는 중보가 있으며, 향촌 북동쪽에는 향촌포강이라는 저수지가 있다.

  • 방축골과 계마대 위성사진
    방축골과 계마대 지역의 사선을 친 작은 원이 마을이 있던 곳으로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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