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서브이미지

김백심 암브로시오

김백심 암브로시오(1794 ~ 1866)

김백신 암브로시오 가족들은 벌써 신유년(1801) 박해 이전부터 천주교에 입교했었다. 김 암브로시오의 부친 김의호는 주문모 신부를 모시고 있었던 유서깊은 신자 집안이었다. 김의호는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서울에서 주 신부와 함께 미사방에 있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1802년 1월 29일(음력 1801년 12월 26일) 순교했으며 동시에 만 15세이던 김 암브로시오의 형 김희달도 체포되어 강원도 평창으로 유배되었다. 김백심은 당시에 9세였다.

모친은 어린 김 암브로시오를 데리고 큰 아들 귀양처로 찾아가서 그곳에서 살았는데, 귀양살이가 풀린 후에도 열심히 수계하면서 봉교하였다. 김백심은 평창에서 장성하여 가정을 이룬 뒤에는 제천 베론의 장주기(요셉) 회장에게 교리를 배웠고, 이후 경상도 순흥 땅으로 이주해 살던 중에 세례를 받았다. 그런 다음 가족들을 데리고 음성 맹골면 방축골로 이주해 가족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이곳에서 김백심은 3남인 김 사도 요한(1835∼1866)을 배티에 있는 조선대목구 신학교에 입학시켰는데, 사도 요한은 1854년 페낭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가 1863년에 귀국한 뒤 환속했다.

김 암브로시오는 1866년 병인박해때 ‘성교회의 우두머리’라는 죄명으로 둘째아들 김성서 파비아노와 함께 참수 치명하니 김 암브로시오의 나이는 72세이고, 큰 아들 바오로의 나이는 46세였으며, 이때 충주에서 부친과 함께 체포되어 순교한 둘째 아들인 김 파비아노는 38세이고, 김 사도 요한(신학생)은 30세로서, 네 부자가 동시에 순교자의 가족으로 영광을 입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