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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윤명 프란치스코

민윤명 프란치스코(1822 ~ 1866)

민윤명 프란치스코(1822 ~ 1866)회장은 1822년 충주 광벌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열일곱 살 되던 해 진천 비들목(현 충북 진천군 광혜원면 광혜원리)에 살던 임여문의 부친인 임 회장에게 천주 교리를 배워 영세 입교한 그는 언제나 교회 가르침에 따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마음이 양순한데다가 말을 아끼는 사람이라고 칭찬하였다.

1860년 경신박해가 시작되자 민윤명은 광벌을 떠나 음성 맹골의 하계안 계마대로 이주하여 그곳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그 다음해 천주교 신자들을 위협하여 돈을 갈취하려는 포졸들이 그를 체포하였으나 돈을 빼앗고는 풀어주었다.

1866년 10월 16일 다시 체포되어 충주로 압송되어 50일 동안 충주 옥에 갇혀 있으면서 문초와 형벌을 달게 받았다. 1866년 말에 옥중 교우들과 함께 순교하였으니, 그때 그의 나이 44세였다. 순교 후 그의 시신은 아우인 야고보가 거두어 안장하였다.  현재 충주 관아공원 내에 있는 순교 현양비에는 김성서 파비아노와 민윤명 프란치스코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병인박해 순교 역사를 기록한 ‘병인치명사적’ 23권 165쪽에는 민 프란치스코를 ‘마음이 순량하고 말을 드물게 했다. 수계하는 범절과 규구 지킴에 부지런했다’고 기록돼있다.

1861년에 교우들의 돈을 노린 죽산 포교 한 명과 서울 포교 김도철에게 체포됐다가 돈 30냥을 빼앗기고 풀렸으며 이때 “천주학을 한다”고 자백하고 십계명을 풀어서 설명했으며 “교우들을 밀고할 수 없노라”고 말했다고 한다

1866년 병인박해때 다시 서울포교 김도철에게 체포돼 충주옥에서 순교했으며 순교하기전 아우 야고보에게 편지를 보내 “내가 죽은 후라도 집안과 인리, 친척과 화목하게 지내도록 하고 타당하게 성교회의 가르침을 지키다가 영복소(천국)에서 만나자”라고 당부했다.